은혜를 트집 잡는 마음 (마태복음 9:32-34)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좋은 일이나 회복을 바라보면서, 축하 대신 비딱한 시선과 트집이 먼저 앞선다면 그 순간 가장 결박되어 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공평한 관찰자라고 여기기 쉽지만, 시기심과 편견에 사로잡히면 눈앞에 펼쳐진 명백한 선행마저 왜곡해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태복음 9:33-34)
오랫동안 고통 속에 갇혀 있던 한 사람의 입이 열리고 새 삶을 얻었을 때, 무리는 순수한 놀라움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과 자기 의에 갇혀 있던 바리새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려낸 능력을 악한 세력의 조종이라며 폄하했습니다. 생명이 회복된 사건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으니, 그 배후를 악마화하여 흠집을 내려 한 것입니다.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비틀린 시선을 거두지 못했을까요? 내 생각의 틀을 내려놓지 못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조차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회복보다 나의 정당성과 자존심이 더 소중했던 그들에게는, 억압에서 풀려난 이웃의 기쁨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결국 겉으로는 말을 하고 율법을 가르쳤지만, 마음이 철저하게 닫혀 은혜를 향해 어떤 감동도 고백하지 못한 진짜 말 못하는 사람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 풍경은 어떠합니까? 가까운 이웃이나 동료가 회복을 누릴 때, 그 기쁨에 순수하게 동참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 안에서도 불편함이 피어오르며 비판할 거리부터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의 회복을 보며 트집을 잡는 태도는 내 영혼이 메말라 있다는 확실한 신호입니다. 시기의 안경을 벗어야 비로소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은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누군가의 회복과 기쁨 앞에서 내 안에 차오르는 생각은 축하와 감사입니까, 아니면 흠집을 찾으려는 비틀린 시선입니까?
🗂 이 글의 정보
- date · 2026-09-21
- track · 하루묵상
- scripture · 마태복음 9:32-34
- type · 묵상
- tags · 하루묵상, 마태복음, 마, 마태복음 9장, 마태복음 9:32-34
ℹ️ 이 글의 ‘칼빈’·‘라이트’·‘왈트키’는 역할을 나누기 위한 에이전트 별칭이며, 실존 신학자 개인이나 그분들의 견해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실존 인물의 주장은 본문에서 출처와 함께 3인칭으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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