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 @설교팀 타겟날짜 2026-07-29의 매일성경 QT 본문(이사야(Isaiah) 10:20 - 10:34)에 대한 설교 및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해줘. 연구 노트
- 작성자: ⛪ 디모데 (PASTOR)
- 작성일자: 2026-07-22 02:45:20
- 세션 ID:
session_20260722_020059
철 도끼와 그루터기 사이에서 (이사야 10:20-34)
1. WHY (신념 및 가치관) - 헛된 피난처와 만군의 여호와의 통치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피난처를 찾습니다.
거친 세상의 풍파와 위기가 밀려올 때, 당장 눈앞의 위협을 막아줄 든든한 울타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통장의 잔고나 가시적인 재산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망일 수도 있습니다.
8세기 남유다 백성들도 동일한 실존적 불안에 직면했습니다.
당대 고대 근동의 정점에 섰던 세계 제국 앗수르는 무자비한 칼날을 휘두르며 사방의 나라들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가공할 군사적 위협 앞에서 유다 백성과 왕은 하나님보다 앗수르라는 거대한 세력과 타협하고, 그들의 힘을 의지하여 목숨을 연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명확한 기독교적 신념을 선포합니다.
하나님 없이 구축한 인간의 모든 피난처는 결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세상의 피난처가, 훗날 우리를 가장 아프게 찌르는 가시가 되어 돌아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세상의 패권자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제국의 무자비한 철 도끼가 예루살렘의 턱밑까지 다가오는 극심한 절망 한가운데를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방어선이 허망하게 허물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은 역사의 진정한 각본을 쓰시는 주권자로 강림하십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교만한 숲을 가차 없이 베어내시며, 오직 주님의 은혜로 보존하신 '남은 자'를 통해 구원의 새 생명을 피워 내십니다.
그렇다면, 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하나님을 나의 참된 피난처로 모시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석의적 진리를 따라,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복음의 삶의 원리를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2. HOW (어떻게 그 신념 및 가치관을 반영할 것인가?) - 철 도끼와 그루터기 사이에서 성도가 서야 할 자리
1. 세상의 피난처를 버리고 오직 '엘 기보르'께로 진실하게 돌이켜야 합니다 (20-23절).
성도가 세상의 위기 속에서 승리하는 첫 번째 길은,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착각했던 세상의 헛된 줄을 끊어내고 '능하신 하나님', 곧 '엘 기보르'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사 10:20)
오늘 20절을 보시면, 유다 백성의 비극은 단순히 거대한 적이 몰려왔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진짜 비극은 그들이 "자기를 친 자", 즉 앗수르의 힘을 구원자로 착각하고 의지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상처 입히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세상의 힘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치는 것이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마침내 거룩한 용광로와 같은 연단을 통과한 주님의 백성이 "다시는" 세상의 피난처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여기서 '의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샤안(מִשְׁעַן)'은 몸의 온 체중을 다른 대상에게 완전히 실어 맡기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과거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은 앗수르라는 썩은 밧줄에 자신들의 체중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징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깨닫게 됩니다.
나를 지켜줄 줄 알았던 세상의 힘이 실상은 나를 무참히 짓밟는 철퇴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처절한 깨달음 끝에 비로소 진정한 돌이킴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이 돌아오는 무리를 가리켜 '남은 자', 히브리어로 '시아르(שְׁאָר)'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치열한 전쟁터에서 가차 없이 베어지고 살아남은 '애처로운 생존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 속에서 이 단어는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거친 파도 속에서 가시적인 수적 우위나 세력은 다 잃어버렸을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거룩한 영적 핵심 무리'를 가리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사 10:21)
21절에서 "돌아올 것이라"는 히브리어 '야슈브(יָשׁוּב)'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이라 지었듯이, 이 돌아옴은 단순한 공간적 귀환이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던 배교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심오한 '영적 회개'를 뜻합니다.
세상 제국의 왕들은 고대 근동 비문에서 자신의 군사적 힘과 정복을 가리켜 '내 팔의 능력과 지혜로 이룬 일'이라며 스스로를 절대자로 선전했습니다.
'기보르(용사, 강자)'라는 칭호로 자신을 높이며 만국을 약탈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그들의 오만한 선전 한복판에서, 진짜 '능하신 하나님', 곧 '엘 기보르(אֵל גִּבּוֹר)'는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한 분뿐이심을 외칩니다.
세상이 제아무리 거대한 돈과 힘의 논리로 우리를 위협하며 주먹을 흔들지라도, 참된 힘의 주권자는 오직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이 회개는 우리가 쥐어짜 내는 의지적 공로나 조건이 아닙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수많은 무리 중에서 오직 남은 자만이 돌아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은혜로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고, 성령의 효력 있는 은혜로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피난처를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진실하게 바라보게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우리 삶을 강권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2절입니다.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멸망이 공의로 성취됨이라" (사 10:22)
이 구절은 우리에게 엄중한 질문을 던집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외형적인 세력이 거대하다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언약 공동체인 것은 아닙니다.
외형적 테두리에 머무는 '가시적 교회'와, 정말 시련의 용광로 속에서 여호와만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불가시적 교회'는 다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이사야의 '남은 자' 구절을 인용하며 더욱 놀라운 구속사적 진리를 선포합니다.
구약의 역사적 심판을 견뎌낸 소수의 남은 자가 있었기에,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열방과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구원의 문이 열리는 '접붙임의 은혜'가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남은 자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끼리 살기 위해 고립된 소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할 선교적 씨앗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세상의 번영과 타협하며 숫자를 자랑하는 길을 버리고, 비록 외롭고 적을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참된 수호자로 모시는 거룩한 '남은 자'의 자리에 서시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를 억압하는 세상의 멍에는 인간적인 반역으로 깨뜨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소생과 기름 부으심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세상의 멍에는 자연스럽게 끊어집니다.
선지자는 앗수르의 가혹한 압제를 소의 목에 씌운 '무거운 멍에'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27절은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그 날에 그의 멍에가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굴레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짐으로 말미암아 굴레가 부러지리라" (사 10:27)
고대 근동의 농경 관습에 따르면, 주인의 가혹한 학대로 목이 상한 소라 할지라도, 좋은 꼴을 먹고 건강하게 살이 쪄 목이 굵어지면 앗수르가 씌워 놓은 무거운 철 멍에를 스스로 터뜨려 깨뜨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백성들이 다시 영적으로 '기름지고 강건해지면', 그 목의 생명력과 굵어짐으로 인해 원수가 씌워 놓았던 그 단단한 철 멍에가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쩍 갈라지며 부러질 것입니다.
세상의 억압을 깨뜨리는 비결은 인간적인 반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영적인 소생과 기름 부으심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세상의 멍에는 자연스럽게 끊어집니다.
2. 가장 치열한 시련의 경계선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4-32절).
성도가 세상의 위기 속에서 승리하는 두 번째 길은, 내 모든 인간적인 대안과 방어선이 무너지는 최극단의 자리에서도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 28절부터 32절까지는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으로 몰려오는 숨 가쁜 진격 경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아얏, 미그론, 믹마스, 게바, 라마, 기브아, 아나돗 등 12개 지명을 연달아 나열합니다.
사방의 국경 도시들이 파죽지세로 무너지고, 통곡 소리가 산울림처럼 터져 나옵니다.
28절과 32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자리를 두고" (사 10:28)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드리로다" (사 10:32)
성도님들, 당시 상황을 시각적으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실제 역사 속에서 산헤립의 주력 부대는 남서쪽 라기스 경로로 올라왔으나, 선지자는 성령의 영감에 따라 북쪽 국경에서부터 예루살렘 턱밑까지 적군이 압박해 들어오는 종말론적 시적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군의 발자국 소리가 믹마스에서, 게바에서,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이 눈앞에 바로 바라보이는 '놉(Nob)' 언덕까지 도달했습니다.
적장은 놉 언덕에 서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 오만하게 주먹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제 끝이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이때의 예루살렘은 피할 길이 없는 철장 안의 새와 같았습니다.
유다 백성이 구축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군사적 방어선은 정확히 0%로 수렴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12개 지명 속에서 '가련한 아나돗'이 유린당하는 것에 주목해 보십시오.
아나돗은 아론 가문의 제사장 성읍이자 언약적 종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이곳이 함락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파괴를 넘어, 예배의 외형만 남고 삶의 정의가 부패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가시적 언약 공동체의 성소마저 예외 없이 유린하신다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현대 교회가 성전 이데올로기나 종교적 기득권에 안주하는 태도를 예언자적으로 폭로하는 강력한 쐐기가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토록 극심한 절망의 절벽 끝까지 몰아가시는 것일까요?
왜 놉 언덕에 적군이 서서 주먹을 흔들 때까지 가만히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무슨 말입니까?
바로 그 순간이 인간의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일어나는 '신정론적 결곡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라는 제국을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하기 위한 '분노의 막대기'이자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제1원인이 되셔서, 제국의 악한 행동(제2원인)조차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 주권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도구에 불과한 앗수르가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세계를 정복했다고 오만에 빠져,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며 예루살렘을 향해 주먹을 흔드는 순간, 신적 인내의 한계선이 도달합니다.
그 순간 도구로서의 사명은 끝나고, 창조주를 거역한 세력을 향한 하나님의 철퇴가 내려집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가 당하는 문제와 시련이 내 인생의 턱밑인 '놉' 언덕까지 밀고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가, 재정의 위기가, 자녀의 고통이 내 모든 인간적인 수단과 대책을 완벽하게 무력화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방어가 완벽하게 허물어지는 바로 그 자리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거룩한 지점입니다.
세상의 권세가 기세등등하게 주먹을 흔들 때, 두려워 떨지 말고 그 너머에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주권적 손길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3. 인간의 자랑이 베어진 그루터기 위에서 피어나는 십자가의 생명을 의지해야 합니다 (33-34절).
성도가 세상의 위기 속에서 승리하는 세 번째 길은, 내 삶의 화려한 가지들이 도끼질당할 때 좌절하지 않고, 오직 주님이 준비하신 십자가의 신학, 곧 메시아의 영원한 생명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 33절과 34절은 본문의 장엄한 클라이맥스를 장식합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소나무가 높았던 자가 찍힐 것이요 그 희황한 자가 낮아질 것이며" (사 10:33)
"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어지리라" (사 10:34)
33절과 34절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신령한 산림 감독관'이 되셔서 손에 철 도끼를 들고 강림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호령하던 앗수르라는 거대한 숲, 레바논의 빽빽한 백향목 숲을 사정없이 잘라내십니다.
지평선을 가득 채우며 우뚝 솟아 있던 거대한 나무들이 하나님의 철 도끼질 한 번에 사정없이 찍혀 쓰러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 수종(樹種)의 차이를 관찰해야 합니다.
앗수르로 대표되는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근동에서 제국의 화려한 영광과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백향목은 한 번 밑동까지 베어지고 나면, 그 뿌리에서 다시는 새 싹이 돋아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교만하게 스스로를 높인 세상 제국의 벌목은 역사 속에서의 완전하고 영원한 소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세속의 영광은 철저히 유기되어 다시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징계 아래 베어짐을 당한 다윗 왕조, 유다 백성의 나무는 어떻게 됩니까?
이어지는 이사야 11장 1절은 소망의 역전을 선포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1)
유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를 맞아 밑동만 남은 초라한 그루터기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참나무나 밤나무가 베어져도 그 그루터기에 생명력이 남아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밑동에는 신비로운 하늘의 생명력이 온존해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화려했던 왕 '다윗'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대신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시골 목자 가문이었던 '이새(Jesse)'의 이름을 끌어옵니다.
왜요?
인간이 구축했던 다윗 왕가의 모든 화려한 왕족적 특권과 기득권, 정치적 자랑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벽하게 리셋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랑과 공로가 완전히 잘려 나간 그 초라한 그루터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밑동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한 싹(Branch)을 틔우십니다.
이 싹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구원은 인간의 화려함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약속하셨던 다윗 언약을 끝까지 기억하시고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Fides Dei)'의 결과입니다.
성도님들, 영광의 신학은 세상 백향목처럼 끊임없이 위로 뻗어가는 화려함과 성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가장 비참하게 베어진 그루터기에서만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다윗 왕조의 철저한 몰락, 곧 이새의 뿌리로의 리셋은, 메시아가 영광의 왕좌가 아닌 낮고 천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실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적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때로 우리 인생의 화려한 백향목 가지들을 사정없이 잘라내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자랑하던 건강의 가지, 내가 의지하던 재물의 가지, 내가 기대했던 세상적 성공의 가지들이 철 도끼에 찍혀 쓰러질 때 우리는 비명을 지릅니다.
"하나님, 왜 내 인생을 이토록 무참하게 베어내십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유익을 위해 뻗어 있던 거짓된 자랑의 가지들이 잘려 나가지 않으면, 내 인생의 밑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이 싹트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베어진 그 초라한 그루터기야말로, 오직 주님의 은혜와 생명이 시작되는 은혜의 터전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그루터기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부활 생명을 반드시 피워 내실 것입니다.
3. WHAT (적용) - 말씀을 정리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 안에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오늘 철 도끼가 번뜩이고 그루터기만 남겨지는 역사의 엄위한 현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제국은 거대한 백향목 숲처럼 당당해 보이고, 세상의 힘은 우리를 당장이라도 삼킬 듯이 예루살렘 턱밑 '놉' 언덕까지 밀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세속의 화려한 숲은 하나님의 심판의 철 도끼 앞에 영원히 쓰러질 시한부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세상의 제국이 아니라, 역사의 각본을 집행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영적 피난처를 정직하게 점검하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나를 상처 입히는 세상의 앗수르를 구원자로 착각하여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의 성과와 경험을 내 힘으로 이루었다 착각하는 영적 오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세상의 피난처를 향한 헛된 기대를 버리고,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진실하게 돌이키는 '남은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여 외형적 종교성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은혜의 용광로를 거쳐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참된 남은 자'의 신앙의 본질로 날마다 개혁되어 가야 합니다.
내 힘과 가능성이 밑동째 베어져 초라한 그루터기만 남은 것 같은 고난의 현장에 서 계신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십시오.
그 자리는 망하는 자리가 아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메시아의 새 싹을 피워 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 한 주간, 세상의 무자비한 철 도끼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끝까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만을 굳게 붙드시기를 축복합니다.
베어진 그루터기 위에서 생명의 싹을 틔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 위에 영원히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피난처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거대한 권력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더 의지했던 우리의 어리석은 불신앙과 영적 교만을 회개합니다.
우리 인생의 턱밑까지 시련의 파도가 밀려오고, 내가 쌓아 올린 인간적 대안들이 허망하게 허물어질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인간의 모든 방어가 끝나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시작되는 자리임을 믿게 하시고,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남은 자'로 서게 하소서.
내 삶의 화려한 가지들이 베어지고 초라한 그루터기만 남은 것 같은 아픔을 지날 때에도, 그곳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피워 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바라보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을 나의 참된 방패와 피난처로 모시고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나이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의 모든 헛된 피난처를 베어내시고 오직 신실한 언약의 그루터기 위에서 영원한 생명의 싹을 틔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세상 제국의 교만을 심판하시며 택하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위기와 고난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우리 마음을 돌이키사 여호와만을 진실하게 의지하도록 날마다 감동하시고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세상의 거대한 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직 만군의 여호와만을 참된 피난처로 삼아 승리하기를 결단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과 이들의 가정과 일터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항상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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